해미 곽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2. 역사
해미 곽씨는 현풍 곽씨 시조 곽경(郭鏡)의 12세손인 곽해(郭海)를 시조로 하는 분파이다. 곽경은 중국 관서(關西)의 홍농인(弘農人)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1138년(인종 16) 과거에 급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등을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
1936년 발간된 《해미곽씨세보(海美郭氏世譜)》에 따르면, 곽경 이후 2세 곽헌(郭憲)은 지승선(知承善), 3세 곽림(郭琳)은 문하대아찬(門下大牙贊), 4세 곽연(郭演)은 문하중랑장(門下中郞將), 5세 곽기정(郭其正)과 6세 곽자응(郭子膺)은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기록은 곽해 이전의 선대가 현풍 곽씨와 일치하여 해미 곽씨가 현풍 곽씨의 분적종임을 보여준다.
《만성시조약사(萬姓始祖略史)》에는 곽승(郭繩)이 충청남도 해미(海美)로 귀양 가서 해미 곽씨의 세계(世系)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1743년(계해보)에 발간된 포산곽씨족보를 바탕으로 한 오해이다. 곽승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현풍 곽씨 판관공파(判官公派) 14세이며, 해미 곽씨와는 관련이 없다. 곽승은 곽해보다 반세기 이상 후세 사람인데 1743년 계해보에 곽해의 할아버지로 잘못 기록되었다.
1976년 족보(병진보)부터 12세 곽해(郭海)를 해미 곽씨 시조로 인식하고 있다. 곽해는 고려 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관직을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해미(당시는 여미)로 내려가 숨어 지냈다.
2. 1. 시조
해미 곽씨(海美 郭氏)는 현풍 곽씨 시조인 곽경(郭鏡)의 12세손이자 고려 공민왕 때 중랑장을 지낸 곽해(郭海)를 시조로 한다.[1] 1936년에 발간된 《해미곽씨세보(海美郭氏世譜)》에 따르면, 곽경 이후 곽해 이전의 선대가 현풍 곽씨와 일치하여 해미 곽씨가 현풍 곽씨에서 분적된 종(宗)임을 추정할 수 있다.[1]1976년 족보(병진보)부터 12세 곽해(郭海)를 해미 곽씨 시조로 인식하고 있다.[1] 곽해는 고려 말 이성계의 용흥에 반대하여(두문동 48현) 관직을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세상을 떠돌다 지금의 해미(당시는 여미)로 내려가 숨어 지냈다.[1] 후손들은 해미군을 제수받았다고 쓰고 있으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하지 않다.[1] 다시 계룡산(지금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송정동)에서 잠시 머문 뒤, 광주 임곡(林谷)의 소고룡방(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막동)으로 내려와 은둔했다.[1] 곽해는 호남입향조로 많은 후손들이 호남을 주 근거지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1]
2. 2. 본관
해미 곽씨(海美 郭氏)는 현풍 곽씨(玄風 郭氏) 시조인 곽경(郭鏡)의 12세손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중랑장을 지낸 곽해(郭海)를 시조로 한다.[1] 곽경은 중국 관서(關西)의 홍농인(弘農人)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1138년(인종 16) 과거에 급제한 후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등을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2]1936년 발간된 《해미곽씨세보(海美郭氏世譜)》에 따르면, 곽경 이후 곽해 이전의 선대가 현풍 곽씨와 일치하여 해미 곽씨가 현풍 곽씨의 분적종임을 추정할 수 있다.[3]
1958년 발간된 《만성시조약사(萬姓始祖略史)》에는 곽승(郭繩)이 충청남도 해미(海美)로 귀양 가서 정착하여 해미 곽씨의 세계(世系)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4]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곽승은 해미 곽씨와 관계없는 조선시대 사람으로, 현풍 곽씨 판관공파(判官公派) 14세이다.
곽승은 곽해보다 반세기 이상 후세 사람인데도 1743년 계해보에 곽해의 할아버지로 잘못 등재되었다. 이후 족보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하고 후손들이 여러 차례 수정한 끝에, 1976년(병진보)부터 곽해를 해미 곽씨 시조로 인식하고 있다. 곽해는 고려 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두문동 48현)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해미(당시 여미)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후손들은 곽해가 해미군에 봉해졌다고 주장하나, 관련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곽해는 호남 입향조로, 많은 후손들이 호남을 중심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해미(海美)는 충청남도 서산시에 있는 지명으로, 정해(貞海)와 여미(餘美) 두 현이 합쳐진 이름이다. 1407년(태종 7) 정해현과 여미현을 합쳐 해미현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해미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서산군에 병합되었다가 1917년 해미면으로 개칭되었다.
2. 3. 분파
해미 곽씨는 현풍 곽씨 시조인 곽경(郭鏡)의 12세손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중랑장을 지낸 곽해(郭海)를 시조로 한다.[1] 곽해는 호남 지역에 정착한 선조로, 많은 후손들이 호남을 중심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중랑장공파 아래에는 다음 5개 파가 있다.- 주부공파
- 목사공파
- 참봉공파
- 경은공파
- 계공랑공파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막동 유연재(油然齋)에서 곽해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사를 지낸다.
3. 주요 인물
해미 곽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명, 무과 급제자 2명, 생원시 합격자 5명, 진사시 합격자 4명을 배출하였다.[4]
문과 | ||
---|---|---|
곽기수 | 곽성구 | 곽제화 |
무과 | |
---|---|
곽희인 ((중종 35년, 1540년) 무과 급제) | 곽곤 (선조 17년, 1584년) 별시 병과 합격) |
생원시 | ||||
---|---|---|---|---|
곽치요 | 곽급 | 곽성구 | 곽성봉 | 곽제화 |
진사시 | |||
---|---|---|---|
곽형 (명종 10년, 1555년) 을묘 식년시 합격) | 곽기수 | 곽제화 | 곽제항 |
3. 1. 조선 전기
곽기수(1549년 ~ 1616년)는 자가 미수(眉壽), 호가 한벽당(寒碧堂)이며, 본관은 해미(海美)이다. 아버지는 세공(世功)이며, 전라도 강진(康津) 출신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부안현감 재직 중 부모가 모두 90세가 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광해군 치세에는 두문불출하며 『주역』 연구에 몰두하여, 『주역』 암송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저서로는 『안택지(安宅誌)』·『사방해(四方解)』 등이 있다.[1]곽성구(1606년 ~ 1668년)는 곽기수의 손자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631년(인조 9) 태학시취(太學試取)에서 2등을 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은전을 입었으며,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0년 지평, 1646년 장령에 올랐으며, 1665년(현종 6)까지 10여 차례 장령에 임명되었다. 정언을 거쳐 1650년(효종 1) 필선이 되어 훗날 현종을 보도하였다. 1655년부터 1667년까지 헌납에도 여러 차례 올랐다. 문집으로 『현주세고(玄洲世稿)』 2권 1책과 친필문집 남한록(南漢錄)이 전한다.[2]
곽제화(1625년 ~ 1675년)는 곽성구의 아들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정언·장령을 역임하였다. 1663년(현종 4) 경성판관이 되었을 때 월과(月課)를 세 번이나 짓지 않아 파직되고 본읍에 충군(充軍)되었다. 1675년 다시 헌납에 제수된 이후 사간·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3]
해미 곽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4]
문과 | ||
---|---|---|
곽기수 | 곽성구 | 곽제화 |
무과 | |
---|---|
곽희인(郭希仁) | 곽곤(郭崑) |
생원시 | ||||
---|---|---|---|---|
곽치요(郭致堯) | 곽급(郭岌) | 곽성구 | 곽성봉(郭聖鳳) | 곽제화 |
진사시 | |||
---|---|---|---|
곽형(郭逈) | 곽기수 | 곽제화 | 곽제항(郭齊恒) |
3. 2. 조선 중기
- 곽기수(1549년 ~ 1616년):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미수(眉壽), 호는 한벽당(寒碧堂)이다. 아버지는 세공(世功)이며, 전라남도 강진 출신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며,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뒤 관직이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부안현감에 재직 중 부모가 모두 90여 세가 되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해군의 치세에는 두문불출하면서 오로지 『주역』 연구에 몰두한 결과, 『주역』의 암송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까지 할 정도로 세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저서로는 『안택지(安宅誌)』·『사방해(四方解)』 등이 있다.[1]
- 곽성구(1606년 ~ 1668년): 곽기수의 손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된 뒤, 1631년(인조 9) 태학시취(太學試取)에서 2등을 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은전을 입었으며,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0년 지평, 1646년 장령에 올랐으며, 1665년(현종 6)까지 장령에 10여 차례 임명되었다. 정언을 거쳐 1650년(효종 1) 필선이 됨으로써 이후 현종을 보도하였다. 1655년부터 1667년까지 헌납에도 여러 차례 올랐다. 문집으로 『현주세고(玄洲世稿)』 2권 1책과 친필문집 『남한록(南漢錄)』이 전한다.[2]
- 곽제화(1625년 ~ 1675년): 곽성구의 아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정언·장령을 역임하였다. 1663년(현종 4) 경성판관이 되었을 때 월과(月課)를 계속 세 번이나 짓지 않았다 하여 파직됨과 동시에 본읍에 충군(充軍)되었다. 1675년에 다시 헌납에 제수된 이후 사간·집의를 역임하였다.[3]
해미 곽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4]
문과 | ||
---|---|---|
곽기수 | 곽성구 | 곽제화 |
무과 | |
---|---|
곽희인 ((중종 35년, 1540년) 무과 급제) | 곽곤 (선조 17년, 1584년) 별시 병과 합격) |
생원시 | ||||
---|---|---|---|---|
곽치요 | 곽급 | 곽성구 | 곽성봉 | 곽제화 |
진사시 | |||
---|---|---|---|
곽형 (명종 10년, 1555년) 을묘 식년시 합격) | 곽기수 | 곽제화 | 곽제항 |
4. 인구
연도 | 인구 | 가구 수 |
---|---|---|
1985년 | 799명 | 180가구 |
2000년 | 1,521명 | 457가구 |
2015년 | 3,278명 |
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곽기수
https://terms.naver.[...]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곽성구
https://terms.naver.[...]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곽제화
https://terms.naver.[...]
[4]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LST_021_686_002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